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혼노지의 변 (문단 편집) == 전개 == [[파일:오다판도.jpg]] 1582년, 오다 노부나가는 수도인 [[교토]] 인근 [[키나이]] 지방을 거의[* 불교 세력인 [[고야산|고야잔]]이 아직 노부나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고 [[기이]] 지방 무사들도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던지라 완전히 장악한 상황은 아니었다.] 장악하고 3월에는 숙적이었던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켰다. [[간토]]와 [[도호쿠]]는 노부나가에게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남은 지역은 이제 [[주고쿠]], [[시코쿠]], [[호쿠리쿠]], [[규슈]]뿐이었다. 주고쿠의 [[모리]]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세가 약해진 상황이었고, 호쿠리쿠의 [[우에스기]] 가문은 [[우에스기 겐신]]이 사망한 뒤 후계자 문제로 내분이 일어난 상황이었다. 시코쿠에서는 원래 시코쿠의 절반의 지배자인 [[미요시]]씨 일족인 [[소고 마사야스]] · 미요시 야스나가 · 아타기 노부야스 등이 노부나가의 편에 서서 [[쵸소카베]] 가문과 일전을 치를 태세였기 때문에 쵸소카베 가문은 여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바야흐로 노부나가가 일본을 통일하는 것은 시간문제인 듯했다.[* 이 당시 오다 노부나가가 단독으로 동원시킬 수 있는 병력의 수는 무려 7만에 근접했다. 그 이전 전국의 다이묘들 중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던 다케다 신겐이 동원할 수 있던 병력이 3만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본의 최강이 된 것이다.] 그런 가운데 미츠히데는 다케다 가문 토벌전에서 귀환한 뒤 다케다 가문 토벌전에서 큰 공이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접대할 것을 명령받고 5월 15일부터 이를 진행했다. 하시바 히데요시가 모리 가문을 상대하는 와중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노부나가는 미츠히데에게 본거지로 돌아가 주고쿠로 출전해 히데요시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츠히데는 이에 5월 26일, 자신의 본거지 성 중 하나인 탄바의 카메야마 성으로 가서 출진 준비를 했다. 그리고 5월 28일과 29일, 아타고 산의 신을 숭배하는 아타고 신사에 공물을 바쳤다. 통상적인 출전 준비 과정으로 볼 수 있으나, 이때 [[아케치 미츠히데]]는 의미심장한 [[하이쿠]]를 지었다. > 時は今 雨が下しる 五月哉 > 지금 이때는 / 비가 밑을 적시는 / 5월이로다 이는 단순히 비가 세상을 적시는 5월 풍정 혹은 노부나가가 지배하는 세상의 5월 풍정을 노래한 글(時は今 天が下知る 五月哉)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발음인 ときはいま あめがしたしる さつきかな는 "토키(土岐)는 지금, 천하(天が下→天下)를 지배하는(知る→支配する) 5월이로다"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는 '[[토키]][* 土岐, [[무로마치 바쿠후]]가 [[미노]] 슈고로 임명하여 미노를 지배한 집안으로, [[겐지]]의 분파이고 [[아케치]] 가문의 원류. 토키 가문을 몰아내고 미노를 차지한 것이 [[사이토 도산]], 즉 오다 노부나가의 장인이다.] 출신의 내가 바야흐로 이 5월에 천하를 얻겠다'는 뜻.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미츠히데가 노부나가를 칠 것을 암시한 걸로 해석한다. 한편 노부나가 본인도 5월 29일, 히데요시를 구원하기 위한 병력을 기다리기 위해 아즈치성을 출발해 교토 [[혼노지]]로 향했다. 이때 노부나가가 데리고 간 수행원은 1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적은 수행원만 이끌고 간 것은 혼노지가 있는 [[기나이]] 지역을 담당하는 장수가 [[아케치 미츠히데]]였기 때문이었다. 노부나가는 혹시 문제가 생기더라도 미츠히데가 이끄는 병력이 있으니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게다가 혼노지는 단순한 절이 아니라 방비가 잘 되어있는 성채[* 1580년 절을 대대적으로 개증축하여 성채를 갖춘 절로 탈바꿈된 상태였다. 2007년 혼노지가 있는 일대를 발굴한 결과 이런 흔적들을 확인했다고 한다.]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 점도 노부나가가 안심한 요인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 [[파일:external/ksbookshelf.com/HonnoujiZu.gif|width=100%]] || || 혼노지 복원도 || 어쨌든 노부나가는 혼노지에 도착했고, 장남인 오다 노부타다는 교토 안의 묘카쿠지에 들어갔다. 노부나가는 6월 1일, 혼노지에서 다과회를 베풀고 있었다. 한편, 비슷한 시간에 [[아케치 미츠히데]]는 휘하의 1만 3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교토로 향했다. 기록 중에는 미츠히데가 카메야마 성을 떠나면서는 병사들에게 노부나가가 열병식을 하려한다고 했다가 카츠라가와 강을 건넌 뒤에 노부나가를 치겠다는 이야기를 병사들에게 선포했다고는 하지만, 대체로 역사학자들은 실제 혼노지에 도착할 때까지도 일반 병사들은 미츠히데의 의도를 몰랐고 극소수의 가신들 말고는 노부나가를 칠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고 본다. 6월 2일 새벽, 미츠히데가 이끄는 1만 3천여 명의 병력은 혼노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미츠히데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 敵は本能寺にあり! > 적은 혼노지에 있다![* 이 말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에도 시대]]의 라이 산요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그나마도 역사 기록이 아니라 라이 산요의 시 한 구절이다. 그렇기에 미츠히데가 정말로 이 말을 했는지는 불확실하며, 이 말 자체는 사실이 아니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6월 2일의 이른 아침[* 대체로 새벽 4시로 추정한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이끄는 병력이 혼노지를 완전 포위했고, 노부나가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처음 노부나가는 하인들이 싸우는 소리로 생각하고 측근에게 무슨 일인지를 보고 오게 했다. 그러나 측근이 "혼노지가 많은 병력에 의해 포위되어 있고, 병력의 문장이 도라지[* 아케치 가문의 [[가몬(일본)|가몬]]이다.]."라고 보고하자 노부나가는 미츠히데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노부나가는 "도리가 없다, 어쩔 수 없군. (是非に及ばず)"[* 일본어 발음으로는 '제히니오요바즈(ぜひにおよばず)'로 현대어로는 '야무오에누(やむをえぬ)'라고 바뀐다. 노부나가의 측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오타 규이치]]의 저술로 오다 노부나가 연구의 1차 사료이자 1급 사료로 평가받는 [[신장공기]]에서 전하는 말인데, 혼노지의 변 이후에 오타 규이치가 혼노지의 변 당시 노부나가의 마지막 모습을 서술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을 탐문하러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다 당시 노부나가 옆에 거의 마지막까지 있었던 시녀들과 만났고, 그 시녀들에게 '노부나가 님이 마지막에 뭐라고 하셨느냐'고 규이치가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 오쿠보 다다요가 쓴 미카와모노가타리(三河物語)에 의하면 "조노스케(城之介=오다 노부나가의 장남인 노부타다의 관직명)냐?"라고 했다고 되어 있다. 즉, 처음엔 아케치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 하고 자신의 장남을 의심했다는 얘기다. 미카와모노가타리는 신빙성이 좀 의심되는 사료긴 하지만.]이라고 말하며 몰려드는 적들에 활을 쏘며 맞섰다. 그러다가 활이 끊어지자 창을 잡고 계속 싸워나갔다. 그러나 적의 숫자는 훨씬 많았고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입게 되자 싸움을 포기하고 안쪽으로 들어가 [[모리 란마루]]에게 불을 지르게 한 뒤 그 안으로 뛰어들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란마루도 아케치군의 장수 야스다 사쿠베라는 무장에게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 재미있게도 혼노지 근처에는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성당]]이 있었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도 혼노지의 변을 다루고 있는데, 프로이스의 기록에 의하면 미츠히데 군은 새벽 3시 무렵,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혼노지에 들어설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된 이유는 6월 2일에 미츠히데 군이 합류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다 가의 문지기들이 방심한 탓이었다. 노부나가는 화살을 쏘며 미츠히데 군에 맞서다가 미츠히데 군 휘하의 조총 부대의 총격으로 왼쪽 어깨에 총알이 관통하자 안쪽의 미닫이문을 닫은 뒤 불을 질러 자살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는 [[사이토 토시미츠]]의 가신인 야스다 사쿠베가 모리 란마루를 죽이고, 노부나가를 부상입혔다고 한다. 여담으로 야스다 사쿠베는 몇년 후 참수됐는데 기이하게도 혼노지의 변이 일어난 날이었다고 한다. 노부나가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탓에 이것이 후대에 상당한 떡밥으로 남았다. 하지만 불탄 혼노지가 워낙 거대했던 탓에 그 잔해를 헤치고 노부나가의 시체를 찾는 게 무리여서 그냥 내버려뒀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한편 묘카쿠지에 들어간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는 혼노지에서 위급 상황이라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를 구원하러 가려했지만 이미 상황이 종료돼버리자 측근들은 노부타다에게 도망칠 것을 권했다. 하지만 노부타다는 이미 미츠히데가 아즈치 성으로 향하는 길을 봉쇄하고 있을 것이라 판단해 도망치는 것을 포기하고 수비가 용이하지 않은 묘카쿠지에서 [[니조 성]]으로 옮기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노부타다의 판단 착오였다. 미츠히데가 포위를 하고는 있었지만 포위망이 허술했던 탓에 오다 나가마스 등은 도망칠 수 있었다. 노부다타가 니조성이 아닌 아즈치 성으로 도망쳤다면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노부타다의 운명이 거기까지였던 모양.] || [[파일:external/blog-imgs-36-origin.fc2.com/20100527010351b7b.jpg|width=100%]] || 이에 미츠히데는 노부타다를 잡으러 니조 성으로 향했다. 니조 성의 인원은 소수였으나 워낙 완강하게 저항하여 미츠히데 군은 세 번이나 퇴각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교토의 기마무사들까지 움직일 조짐을 보여 반란이 실패할 우려가 생기자, 미츠히데 군은 최후의 수단으로 니조 성 바로 옆의 [[고노에 사키히사]]의 저택 지붕 위로 올라가 총과 화살을 마구 퍼부었다. 이 공격으로 노부타다의 대부분의 측근들이 사망했고 결국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게된 노부타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때 죽은 가신은 무라이 사다카츠, 스가야 나가요리, 사이토 토시하루[* 사이토 도산의 막내 아들]등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